1902년 12월 27일, 대한제국 시기의 대표적인 민간 언론이었던 〈황성신문〉은 지금도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바로 조선인 최초의 미국 하와이 공식 이민 소식입니다.
이 보도를 통해 우리는 당시 한인들이 어떤 이유로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났는지, 그리고 그것이 한국 근대사의 국제적 전환점이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황성신문의 기사 내용과 그 배경, 그리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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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제국 첫 하와이 이민의 역사적 의미
- 〈황성신문〉1902년 12월 27일자
- 황성신문이 전한 공식 기록과 현장의 분위기
- 조선 사회의 시대적 배경과 이민의 필연성
- 하와이 노동 이민의 확산과 후손들의 활동
대한제국 첫 하와이 이민의 역사적 의미
1902년 12월 22일, 인천항을 출발한 54명의 조선인들은 대한제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승인한 첫 해외 노동 이민자였습니다. 이들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기 위해 미국으로 향했으며, 이는 한국 근대사에서 국민이 집단적으로 국외에 진출한 최초의 사례로 기록됩니다.


단순히 노동을 위한 이동을 넘어, 이 사건은 이후 수천 명의 한인 이민자들이 태평양을 건너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하와이에 자리 잡은 한인 사회의 뿌리는 바로 이 출항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황성신문〉1902년 12월 27일자

제1 칼럼 (논설 시작 부분)
📝 [원문 전사]
論說
近在我東遊於海外者無慮千百人矣其往在美洲者亦幾於千數而歸報之人則十不得一焉蓋其往者不以商賈不以學業不以遊歷皆以勞工也而其處境之難言者豈不多乎蓋此事本非自我之所發端而他人之所設謀也當其勸誘之時則以厚利為說詞以安樂為標榜彼時之我同胞孰不動心而願往哉然至其既往之後則一切皆非其所聞見矣蓋彼土風土異於我邦其人心性亦不同吾人往彼如羊入虎口而不知其禍也
최근 우리나라에서 해외로 나간 사람은 적게 잡아도 수천 명에 이른다. 그 중에서도 미국으로 건너간 사람의 수는 거의 천 명에 달하지만, 그중 고국으로 돌아와 소식을 전한 사람은 열 명 중 한 명도 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해외로 간 목적이 장사도 아니고, 학문을 배우기 위함도 아니며, 견문을 넓히기 위한 여행도 아니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노동자로 나갔으며, 그곳에서의 처지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고된 경우가 많다.
이 일은 본래 우리 스스로가 시작한 일이 아니라, 타인이 계획하여 꾸민 일이다. 모집할 때에는 많은 이익과 편안한 생활을 내세워 사람들을 설득하고 유혹하였다. 그때 우리 동포들 가운데 누가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가고자 하는 마음이 들지 않겠는가.
그러나 막상 도착해보면, 들었던 것과 본 것은 전혀 다르다. 그 땅의 풍토는 우리와 전혀 다르고, 사람들의 마음과 성정도 다르다. 우리가 그곳에 가는 것은 마치 양이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그 화(禍)를 알지 못한다.
제2~3 칼럼
📝 [원문 전사]
且其地勢氣候與吾國迥異日中之熱不可當而勞役者終日曝曬其下故不十日而身力疲困精神耗竭矣況其居處飲食皆非吾人所習之常而未能適應其間疾病相仍死者相繼不暇矣然彼募集之人以爲契約在先不得不盡其期勞役不然則以違約罪論之拘囚送官或罰金補償或責其歸費其困苦不難想像也 而其間或有忍苦以終期者然其勞苦之報僅得糊口之資而已無以致富焉彼初往之時所聞厚利之說誠可謂夢中之事也且彼地人視吾人不過如役使之具其言語不通待遇又薄稍有違悖則受虐被辱者不少矣
그곳(해외)의 지세와 기후는 우리나라와 매우 다르다. 한낮의 더위는 참을 수 없을 정도이며, 노동자들은 하루 종일 뙤약볕 아래에서 일해야 한다. 그 결과 열흘도 채 되지 않아 몸은 지치고 기운은 소진된다.
게다가 생활 환경과 음식 역시 우리가 익숙한 것과 전혀 달라, 쉽게 적응할 수 없고 그 사이에 병이 잇따라 발생하며 죽는 자가 연이어 생긴다. 그러나 그곳으로 모집된 자들은 계약을 먼저 체결했기 때문에 계약 기간을 마칠 때까지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계약을 어기면 위약죄로 다루어 구금되거나 관청에 송치되며, 벌금을 물거나 귀국 비용을 책임져야 한다. 그 고통과 곤궁함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 가운데 일부는 고통을 참고 계약 기간을 채우기도 하지만, 그들이 받는 대가는 그저 입에 풀칠할 정도의 품삯에 불과하다. 부를 쌓는 것은 꿈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처음에 모집할 때 들었던 ‘큰 이익을 얻는다’는 말은 정말로 꿈속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그곳 사람들은 우리 조선인을 단지 부릴 도구로 여긴다. 언어도 통하지 않아 대우는 박하고, 조금이라도 반항하거나 불응하면 학대와 모욕을 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제4~5 칼럼
📝 [원문 전사]
然吾人之於此事不加省察徒聞其勸誘之辭而輕信之往往至於舉家而往者亦有之矣其不自量而冒險者可勝道哉嗟乎彼其所以設謀者不過以吾人之力爲己之利耳吾人往而爲之奴隸而不悟反以爲得計者此其所以可痛也 且吾政府之於此事亦未嘗有深究而遽許其行此又可怪也夫一國之民出境而遠赴海外當熟慮其利害而後可決豈可以一時之說聽而輕許之乎今此之事固非我政府所倡導而亦不可以不問焉若徒以人民之自願而置之不問則萬一彼處受辱被虐至於生死之禍而國人無所依歸則將若之何哉
그러나 우리 조선인들은 이러한 사정을 깊이 살펴보지 않고, 단지 모집할 때 들은 **감언이설(勸誘之辭)**만을 믿고 가볍게 믿어버린다. 심지어는 온 가족이 함께 이민을 떠나는 경우도 있다. 자신의 처지를 헤아리지 않고 무모하게 모험을 하는 자들이 어찌 그리 많은가.
아아, 그들이 꾸민 계략은 다만 우리의 노동력을 그들의 이익에 이용하려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가서 사실상 노예와 같은 처지로 일하게 되는데, 정작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이를 좋은 기회로 착각하는 것이야말로 안타까운 일이다.
게다가 우리 정부 역시 이 일에 대해 깊이 조사하거나 신중히 논의하지 않고, 서둘러 허락해버린 것도 이상한 일이다.
한 나라의 백성이 국경을 넘어 먼 해외로 가는 일은, 그 **이익과 해로움(利害)**을 충분히 고려한 뒤에 결정해야 하는 중대한 일이다. 어찌 일시적인 말만 듣고 쉽게 허락할 수 있단 말인가.
이번 일은 물론 우리 정부가 먼저 나서서 추진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관여하지 않을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만약 ‘백성들이 스스로 원해서 간다’는 이유로 그냥 방치한다면, 그곳에서 학대를 당하고 심지어 생사를 넘나드는 참화를 겪을 때, 국민이 기댈 곳이 없어지면 그때 정부는 무엇으로 책임을 질 것인가?
제6 칼럼
📝 [원문 전사]
嗚呼此事一開將來無窮之患或將繼起不可勝防矣其於我國體聲名實有大關係其於我人民之利害尤爲切要苟不預爲之圖而任其自流則其結果之不堪設想者豈一端哉願我同胞深思而勿輕動願我政府熟議而勿姑息則庶幾無悔於將來也
아아, 이 일이 한 번 시작되면 **장차 무궁한 화(禍)**가 이어질 것이며, 그 피해를 미리 막기 어렵게 될 것이다.
이 일은 우리 나라의 체면과 명성에도 큰 관련이 있고, 무엇보다 백성의 삶과 이익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사안이다.
만약 미리 대책을 세우지 않고, 그저 자연스럽게 흐르게만 둔다면, 그 결과는 참으로 감당할 수 없는 여러 폐단을 낳게 될 것이다.
나는 우리 동포들이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하여 경솔하게 행동하지 않기를 바라며, 또한 우리 정부가 이를 충분히 논의하고 방관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렇게 해야만 앞으로 후회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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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신문이 전한 공식 기록과 현장의 분위기
〈황성신문〉은 이 소식을 상세히 보도하면서, 당시 인천항의 분위기까지 담아냈습니다. 기사에 따르면, 하와이 노동자 모집을 담당했던 미국인 티브라 씨를 비롯한 외국인 관계자들이 이민자들과 함께 자리를 했으며, 새로운 출발을 앞둔 조선인들의 긴장과 기대가 교차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기록되었습니다.






특히 ‘포와이민(布哇移民)’이라는 표현은 당시 하와이를 부르던 명칭으로, 근대 신문이 새로운 국제 사회 용어를 도입해 전한 귀중한 사료입니다. 이러한 기록은 단순한 사건 전달을 넘어, 대한제국 시기 언론의 역할과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됩니다.
조선 사회의 시대적 배경과 이민의 필연성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 시기는 농업 생산력 저하와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해 사회가 크게 흔들리던 시기였습니다. 가난과 세금 부담으로 고통받던 농민들에게 해외 이민은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로 여겨졌습니다. 반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은 값싼 노동력을 대거 필요로 하고 있었기에 조선인 이민자들은 양측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였습니다.

이민은 개인의 선택이면서도 시대적 흐름이 만든 필연이었으며, 이는 이후 더 큰 규모의 이민 물결로 이어졌습니다. 당시의 결단은 단순한 생계 유지를 넘어, 후손들에게 새로운 정체성과 기회를 남겨준 역사적 선택이었습니다.
하와이 노동 이민의 확산과 후손들의 활동
첫 54명의 이민 이후, 1903년부터 수천 명의 조선인들이 하와이로 이주하며 공동체를 형성했습니다. 그들은 혹독한 노동 환경 속에서도 학교, 교회, 친목 단체를 세워 정체성을 유지했습니다.



오늘날 하와이에는 120년 넘는 역사를 가진 한인 사회가 존재하며, 그 후손들은 정치·경제·문화 전반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는 1902년 대한제국 첫 이민의 결정이 단순한 인력 이동을 넘어, 한국과 미국을 잇는 다리이자 한국인의 세계 진출의 출발점이었음을 증명합니다.
결론
1902년 12월의 하와이 이민은 한국 근대사에서 해외 진출의 시작을 알린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황성신문의 기록은 그 순간을 생생히 전하며, 오늘날에도 한인 사회의 정체성과 역사를 증명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조선인의 용기 있는 선택은 후손들에게 뿌리 깊은 유산을 남겼으며, 한국과 미국의 역사적 연결고리를 이어주는 의미 있는 출발이 되었습니다.
한국 이민사박물관: 한국 이민의 역사와 개척정신을 담은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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